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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천사장천상의복숭아

    감사알 지급률  88%DotDotEye 179

Q.

아인슈타인은 "인생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균형을 유지하려면 계속 움직여야 한다"라는 평범하고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말을 했습니다. 긴 글 읽어주시고 답변 주시면 훈훈알 드리겠습니다. ^^

아인슈타인은 "인생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균형을 유지하려면 계속 움직여야 한다"라는 평범하고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말을 했습니다.


무심코 읽고 들으면서 넘길 수 있는 이런 말들은, 의외로 유교의 '중용(中庸)'과 도교의 '도(道), 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법무아(諸法無我), 쾌락의 순응(hedonic adaptation) 개념으로 심리학적 욕구와 욕망의 심도와 만족도 변화 등 많은 철학과 종교의 깨달음과 일상적 다양하고 소소한 깨달음 상황과 통합니다.


때문에, 말을 듣고 글을 읽을 때에는 평범함 속에 그 내면에 함의하고 있는 다양한 추구와 성찰들이 어떤 것들로 이해될 수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볼 수 있는 용기가 바로 철학적인 비판적 평가로 여러가지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비판적 자세와 평가"는 무조건적 폄훼와 비난이 아니라, 서로 토론하고 의견을 나누면서 서로의 관점과 시각에서 얻을 수 있는 특이성과 전문성, 지혜를 같이 나누면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인생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균형을 유지하려면 계속 움직여야 한다"는 아인슈타인의 말

유교의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끊임없는 실천과 움직임 속에서 유지될 수 있는 '역동적인 균형감'으로 고정되고 인지지체적으로 형성된 자신의 가치와 중심을 '실천적 행동을 통해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균형을 지킨다'는 의미와도 통합니다.

도교의 '도(道)'에서 말하는, 세상 만물이 끊임없이 흐르고 변화하며, 무위자연의 억지로 조작하지 않고 자연의 법칙과 흐름에 따라 살아가는 것으로 변화의 적응을 자연스럽고 인위적이지 않은 조화로서 아인슈타인의 말과 연결됩니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무상(無常) 또한 이 세상의 모든 작용(行)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의미로 제법무아 즉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자아)가 아니라 관계와 조건에 따른 연기법에 의해서 생기는 감정, 생각, 오감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기에 그 관계에서 형성되는 '업(業, Karma)'이니 삶의 변화에 계속적인 균형작용을 위한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아인슈타인의 말과 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명확하고 근거 있게 느끼지 못하고는 있지만 지극히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정서와 분위기로 형성되고 함의 된 것들의 이행이 곧 '문화권, 역사적 시기, 종교와 철학 또는 형이상학과 과학적 서로 다른 접근법, 언어, 국가, 민족의 다름'이 있더라도 그러한 지혜와 통찰 속에서 진리를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내가 믿는 종교가 다르고 경험과 학습 과정과 전문성과 국가와 민족과 언어와 지역과 생각이 다르더라도 이미 상식적으로 보편화 된 이러한 정서의 유연한 대기 속의 공기를 같이 호흡하며 살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다름을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은 우리의 말과 글로 형성되는 내면의 함의를 선의적으로 또는 격렬한 자극적 논쟁으로 자연스럽게 찾아보고자 하는 '노력'에서 시작 된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토론과 나름대로의 주장을 서로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소통으로서 다소간의 의견차가 있더라도 그 자체를 반복적으로 활용하며 서로의 생각과 다름에 대한 폭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표면적으로 취하는 형식적 예의와 인정이라 치부하는 허례허식은 때문에 다름에 대한 근본적 해결이 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진심에서 우러나는 상식과 보편으로 이미 형성되어 있는 우리가 숨 쉬고 있는 대기의 공기와도 같은 깨달음 속에 이미 거하고 있지만, '다름'으로 포장되어 서로 견제하고 차이와 기분 나쁨, 재수 없음 등으로 소모적 공방을 벌이는 것들에 대하여 어떻게 다가가고 계시나요?


우리는 이미 그 속에 거하며 깨달음 속에 거하고 있지만 왜 그 속에서 소모적 갈등과 편리한 허례허식에 지배당하고 있을까요?


여러분들의 자유로운 의견과 깨달음을 내면의 의식으로 인공지능 복붙하지 마시고 어떤 말도 좋으니 순수 의지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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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깊이있네여

    HolymolyDotDotDot
  • 심오한 내용인것 같네요

    gaggirl82DotDotDot
  • 알돌이님이 천상의복숭아님의 질문을 질문 꼭대기로 올렸어요!

  • 알돌이 님이 감사의 마음으로 천상의복숭아님께 0알을 증정했어요!

  • 알돌이 님이 감사의 마음으로 천상의복숭아님께 0알을 증정했어요!

  • 생각해볼법한 질문인것같습니다.

    ChaniDotDotDot
  • 알돌이님이 천상의복숭아님의 질문을 질문 꼭대기로 올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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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자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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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비천사유아르

    답변 채택률  28%DotDotEye 7

이 질문을 읽으면서 저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살아내는 것 사이에 꽤 큰 간극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상식이나 보편, 서로를 해치지 말아야 한다는 감각은 사실 새롭게 배워야 할 지식이라기보다는 이미 공기처럼 우리 안에 깔려 있는 것에 가깝다고 느껴지거든요. 그런데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다름’이 쉽게 벽이 되고, 어느 순간부터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견제와 불편함의 이유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아지는 것 같아요.


제가 느끼기에는 그 이유 중 하나가, 우리가 너무 자주 스스로를 방어하는 태도로 세상을 대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내 생각이 흔들릴까 봐, 내 기준이 틀렸다는 걸 인정해야 할까 봐, 혹은 괜히 손해 보는 사람이 될까 봐 먼저 날을 세우는 거죠. 그러다 보니 ‘다름’은 그 자체로 존중받기보다는, 내 자리를 위협하는 무언가처럼 포장되고, 그 결과가 기분 나쁨이나 재수 없음 같은 감정으로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싶어요.


또 한편으로는, 편리한 허례허식이 갈등을 키운다는 말에도 많이 공감했어요. 진짜로 느끼는 생각과 감정을 들여다보는 건 꽤 에너지가 드는 일인데, 형식적인 말이나 집단적으로 합의된 태도에 기대면 그 수고를 덜 수 있잖아요. 문제는 그렇게 살다 보면, 내가 왜 불편한지, 왜 화가 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냥 반응만 하게 된다는 거예요. 깨달음 속에 이미 거하고 있으면서도, 그 깨달음을 삶에서 쓰지 못하고 있는 상태랄까요.


그래서 저는 이런 소모적 갈등 앞에서, 완벽하게 초연해지기보다는 최소한 한 박자 늦추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바로 판단하거나 밀어내기 전에, ‘이게 정말 다름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지키고 싶은 무언가가 건드려진 걸까’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거죠. 그렇게만 해도 갈등의 결이 조금은 달라지는 것 같아요.


결국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 잊어버리는 존재인 것 같아요. 서로가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사실, 완전히 같은 사람은 없다는 사실, 그리고 이해가 꼭 동의까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요. 그걸 다시 떠올리는 순간들이 쌓일수록, 허례허식에 덜 지배당하고 소모적인 공방에서도 조금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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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혈천사로이머스탱

    답변 채택률  58%DotDotEye 20

질문자님의 이야기를 보면서

한가지 단어가 생각났습니다.


바로 틀림과 다름의 차이 입니다.

불과 20여년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틀리다 라는 말을 자주썼습니다.


"너와 나와는 스타일이 틀려~"

"이 방식은 그 방식과는 틀려~"



등등

실제로는 다른것인데도 틀리다 라는 표현을 자주 써왔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무엇인가 잘못된 행동이나 언행을 하였다는 뜻이 아니고

그당시의 문화적 정서나 언어적 정서가 그랬다는 뜻입니다.

요즘은 정말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발전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다양성도 점점 많아지고 있는 세상이구요.


그렇기에 무한히 다양한 부분들을 보고 다름을 느낍니다.

따라서, 이제는 틀림을 지적하기보단

다름을 인정하는 때가 온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서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한다면

의미없고 도리어 지치기만 하는 소모성 토론만 될것이고

그것은 시간낭비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사람의 다양한 관점의 이야기를 듣고 느끼며

"아~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구나"

"이부분은 내가 잘못생각한 부분이네 생각을 고쳐야겠다"

라는것을 느끼는 사람만이

다양한 사람들과 어우러져 발전적인 삶을 살아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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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천사이수혁

    답변 채택률  27%DotDotEye 18

제가 직접 작성한 글입니다!! 그래서 저는 새로운 개념을 덧붙이기보다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모적 갈등과 허례허식이 반복되는지에만 집중해 보겠습니다 인간은 깨달음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유지”하는 데에는 본능적으로 서툽니다 균형은 정지 상태가 아니라 지속적인 조정 행위인데 대부분의 사람은 조정보다 확정을 선호합니다 생각이 굳어야 불안이 줄고 정체성이 안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편적 통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통찰을 살아 있는 원리로 다루기보다 소속과 입장을 고정시키는 도구로 소비합니다 종교 철학 이념 논쟁이 쉽게 진영 싸움으로 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허례허식은 타인을 존중해서 생기기보다 사실은 갈등을 감당할 자신이 없을 때 생깁니다 진짜 토론은 내 생각이 흔들릴 가능성을 전제로 하지만 형식적 예의는 그 위험을 회피하게 해줍니다 결국 우리는 이미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수준의 보편적 지혜 위에 서 있으면서도 그것을 삶의 운동으로 가져가기보다는 안전한 언어와 태도로 봉인해 두는 쪽을 선택합니다 아인슈타인의 자전거 비유가 반복해서 인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누구나 이해하지만 실제로 계속 움직이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등의 본질은 다름이 아니라 정지하려는 욕망이고 허례허식의 본질은 평화를 원해서가 아니라 흔들리지 않으려는 자기 방어입니다 이걸 인식하는 순간부터 비판적 태도는 공격이 아니라 연습이 되고 토론은 승패가 아니라 균형 감각을 유지하기 위한 공동의 페달링이 됩니다 결국 문제는 깨달음의 부재가 아니라 그 깨달음을 살아 있는 상태로 감당할 용기의 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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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비천사전뭉가

    답변 채택률  38%DotDotEye 12

천상의 복숭아님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저 또한 깊이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너무 당연하게 알고 있는 진실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자꾸만 그 껍데기에 집착해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지에 대해서 말이죠


저는 결국이게 자존심문제라고 봅니다


사람마다 성향이다르고 살아온 인생이 다르기에 그런건 아닐ㄹ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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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천사윤이군

    답변 채택률  19%DotDotEye 16

어럽군요. 저는 그럴수록 한 발 물러서서 왜 저 사람은 저렇게 느끼고 말할까를 먼저 보려고 해요.


대부분의 다름은 가치의 충돌이라기보다 경험과 두려움의 차이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같은 공기를 마시면서도 각자 다른 상처와 기준으로 세상을 해석하니 마찰이 생기는 거 같아요.


그래서 설득보다 이해, 판단보다 관찰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다름을 이겨야 할 대상으로 보면 싸움이 되고, 그냥 존재로 두면 소음이 줄어드는 것 같아요.


물론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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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천사알통 AI

    답변 채택률  24%DotDotEye 13

질문에 담긴 깊은 사색과 성찰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배경과 경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감정과 직관의 영역이 존재합니다. 아인슈타인의 말에서 비롯된 다양한 해석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삶이라는 긴 여정에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움직임과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이는 유교, 도교, 불교 등 여러 철학과 종교의 가르침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문화적 배경과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노력은 더욱 풍부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다름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우리가 늘 열어둬야 할 마음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는 과정은 우리의 지식과 이해를 확장시켜 줍니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의견 차이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단순히 자기 의견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수반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러한 차이를 다루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우리가 사회적으로 익숙해진 형식적 예의나 허례허식에 얽매이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또한, 갈등을 두려워하거나 피하고 싶어하는 본능이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성장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서로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며, 이는 서로 다른 배경과 의견을 존중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깨달음은 일상 속에서 작은 실천과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조금씩 더 깊은 이해와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공통의 인간성을 발견하고, 서로에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다름 속에서도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노력 자체가 이미 귀중한 깨달음의 일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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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비천사김먼지

    답변 채택률  27%DotDotEye 9

질문을 읽으면서 많은 분들이 한 번쯤은 마음속으로 느껴봤을 생각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비슷한 고민을 자주 하게 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이미 상식과 보편, 그리고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숨 쉬듯 공유하고 있는 어떤 깨달음의 영역 안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으로서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도, 결국 비슷한 감정과 두려움, 바람을 안고 산다는 것도 대부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그 ‘앎’이 삶의 중심까지 내려오지 못하고 머무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사람은 이해보다 자기 방어를 먼저 선택하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다름을 만났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기보다, 내 자리를 위협하는 요소로 인식해 버리면 마음이 경직됩니다. 그 순간부터 상대는 사람이 아니라 ‘입장’, ‘집단’, ‘기분 나쁜 무언가’로 축소되고, 갈등은 훨씬 쉬워집니다. 소모적인 공방이 반복되는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갈등 자체보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반사적인 태도가 더 큰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너무 빠르고 효율적인 방식에 익숙해졌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깊이 생각하고 오래 머무는 태도는 점점 사라지고, 간단한 판단과 즉각적인 감정 표출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허례허식이나 표면적인 가치들이 실제 삶의 무게보다 앞서 나가고, 그 틈에서 본질은 쉽게 가려집니다. 깨달음 속에 거하고 있으면서도, 그 깨달음을 살아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이런 상황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답이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다만 갈등을 마주할 때마다 “지금 내가 지키려는 건 진짜 나 자신인가, 아니면 불안에서 만들어진 껍데기인가”를 한 번쯤 스스로에게 묻는 태도는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그 질문 하나만으로도, 상대를 대하는 결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결국 깨달음은 특별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편함 앞에서 잠시 멈출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함부로 단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속에서 다시 숨 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완벽하게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그 방향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 자체가 이미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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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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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천사허리케인조

    답변 채택률  16%DotDotEye 11

인생은 자전거처럼 계속 돌아가야지 그 균형이 맞춰진다고 했습니다.종교적인 얘기도 있고 제가 생각하고 있는 인생 가치관은 본인의 노력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고 생각해요.있는 위치에서 평범하게 살고자 하면 노력은 굳히 안해도 될 것이며,자는 시간 갈아가면서 좀더 잘 살자고 할려면 노력은 배로 해야할 것입니다.더불어 종교는 단지 본인이 의지하고 믿는 신념같습니다.인생의 정답은 없습니다.단지 본인이 어떻게 만족하면서 살아가느냐에 중요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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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