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정신철학 관점의 '관칠자 시점"과 '자기 성찰, 메타인지, 대자적 인지 등', 불교의 '참나', 기독교의 '성령의 임하심'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쓰지만, 자기 경험을 넘어서는 의식의 층위라는 공통된 구조.
정신철학 관점의 '관찰자 시점"과 '자기 성찰, 메타인지, 대자적 인지 등', 불교의 '참나', 기독교의 '성령의 임하심'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쓰지만, 자기 경험을 넘어서는 의식의 층위라는 공통된 구조.
정신철학 관점의 "관찰자 시점"은 일상에서의 "자기 성찰, 메타인지, 대자적 인지, 명상 등"과 같이 “나”라는 주체가 감정·사고·행동을 직접 동일시하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는 또 '다른 층위의 의식'을 강조하고 그 입장과 자리에 들어 나를 보고 평가하며 판단하는 '의식적 층의'로 작용하게 됩니다. 즉 나의 현실 반응 행동력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자리가 관촬자 이하의 자리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불교의 '참나(자성청정심, 여래장)', 성령의 임하심(인간의 영 안에 내주하거나 임재하여, 자기 의식과 구분되는 초월적 차원)의 자리도 자기 경험을 넘어서는 의식의 층위에서, '자신의 학습 되어진 정체(停滯)된 지식이나 경험만을 지상 최대의 절대 진리로 보지 않고, "관찰자적 시점으로 성찰하며 메타인지와 대자적 인지 그리고 참나 자리와 성령이 임하신 자리"에 들어 나의 경험과 현실 삶의 직접적 반응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어야 인간은 더 큰 자유를 갖고 새롭고 창의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많아진다고 합니다.
정리하자면,
정신철학, 종교, 인문학, 삶의 일상에서 보편적 상식, 기타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 많은 노력과 지혜는 '서로 다른 언어와 표현'을 사용하지만 "현실 세계에서의 자기 경험과 학습된 지식 등"을 넘어서는 의식의 층위 자리에 들어서 자기 객관화로 제대로 지신의 현실적 언행과 행적을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어야 그 이상의 더 큰 자유와 창의적이고 다양한 선택을 통해서 나를 제대로 경영해 나갈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인류 역사의 종교, 철학, 인문학 이전의 초기 인류 시기부터 이미 설파되기 시작 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류의 대 통합 및 상생과 화합적 흐름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보자면, 인류 초기의 그런 근원적 깨달음의 자리에 대하여, 원시시대 및 고대 우주관과 자연관과 많은 사람들의 문화권과 인간 다양성에 의하여 오히려 세분화 되고 입장과 이해관계와 역사 및 민족과 국가의 차별화에 의해서, 결국 근원적 진리를 향할 수 있는 '의식의 층위' 자리가 현재의 철학, 종교, 문화 등으로 다변화 되었다는 의미도 설득력을 얻습니다.
인류 인간의 독특한 성정과 다양성 등을 감안해 볼 때에 이러한 인류의 순환적 변화들과 역사적 반복 속에서 인류가 다시 원시 인류 초기 시기의 배움과 깨달음을 구가하던 원천으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화합과 상생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이 함의하고 있는 본질적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인류 출현 및 번성하여 현재까지 이른 시간은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먼지 정도로 비유된다는 측면에서, 위의 질문에 어떤 심오한 답변을 내놓을 수 있을지 여러분들의 자유로운 생각을 표현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