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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 황후(明成皇后/1851 - 1895)
어지러운 정권 다툼 속에서 불행하고
처참한 최후를 맞은 고종의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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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은 외척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려고 친청 가족이 없는 명성황후를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의도와는 달리 명성황후는 소녀시절부터 총명했고, 수완이 능란했다.
명성황후는 왕비가 된 지 수년 후부터는 정치에 직접 관여하기 시작했고,
고종을 대신해 나라일을 돌보고 있는 흥선대원군과 서로 다투는 처지로 발전하였다.
최익현의 상소로 흥선대원군이 물러나자 명성황후는 민씨 일파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이 고집했던
쇄국정책을 버리고 개화정책을 실시하여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한편, 민씨 일파의 세도 정치가 극심해지면서 부정부패로 인한 말썽이 끓이지 않았다.
그러던 1882년 신식군대와 구식 군대와의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은 군사들이 임오군란을 일으켰다.
목숨이 위태로워진 명성황후는 궁궐을 탈출하여 윤태준의 도움으로 충주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하여 겨우 목숨을 건졌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죽었다고 선포하고 다시 정권을 잡았다.
명성황후는 고정에게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린 다음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해 임오군란을 진압했다.
청나라는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압송해 갔고, 명성황후는 다시 권력을 잡았다.
동학혁명으로 청나라 군사가 다시 조선에 들어오자 일본도 조선에 군사를 파견하여 청나라와 일본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명성황후의 세력을 몰아내고 친일 개화파를 앞세워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이에 명성황후는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일본 세력을 몰아내려 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1895년 8월 8일
일본 군대와 자객들을 시켜 명성황후를 살해한 다음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이 바로 "을미사변"이다.
당시 친일 정책을 펴던 정부는 시해된 명성황후를 평민으로 폐위하였으나, 1895년 10월 다시 호를 주었다.
1897년 10월에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명성황후"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