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건국 초기에 "졸본부여", "고구려", "고려" 등의 국호를 혼용하였다. 후기에는 주요 사료에서 "고려(高麗)"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어 장수왕 무렵에 고려로 공식 국호를 정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현대에는 왕건이 세운 고려와 구별하기 위해, 고구려(高句麗)라고 부른다. 고려하고는 차원이 다른 회사이지요........
네이버 지식백과...
48 점
본문 198 자
0
알천사봄이오면
답변 채택률 37% 33
고구려의 고려, 궁예의 고려, 왕건의 고려왕조 총 3번입니다. 고구려라는 국호와 고려라는 국호가 사용된 시기가 엄격히 구분되어 나타 나는데요. 즉 장수왕 대 이후의 기록에는 외국이나 국내의 기록에 모두 고려 로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기사 82번 가운데 69번을 고려라 칭했다고 해요. 이는 아마 『구삼국사』에서 ‘고려본기’로 쓴 것에서 취한 결과가 아닌가 한다고 합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고구려의 국호가 멸망할 때까 지 고구려라는 국호를 계속 사용한 것으로 사료를 수정하여 기술했기 때문에 이 후의 국내 역사서에서는 고구려가 고려라는 국호로 개칭한 것을 모르고 600~70 0여 년을 지내왔다고 합니다.
123 점
본문 282 자
0
알천사hasuo
답변 채택률 33% 35
고구려는 건국 초기에 "졸본부여", "고구려", "고려" 등의 국호를 혼용하였다. 후기에는 주요 사료에서 "고려(高麗)"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어 장수왕 무렵에 고려로 공식 국호를 정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현대에는 왕건이 세운 고려와 구별하기 위해, 고구려(高句麗)라고 부른다
111 점
본문 164 자
0
알천사나는행복한사람
답변 채택률 13% 32
왕건이고려국을세웠지요
109 점
본문 11 자
0
미소천사벌교꼬막
답변 채택률 33% 32
왕건(王建)이 신라말에 분열된 한반도를 다시 통일하여 세운 왕조(918∼1392).
918년 왕건에 의해 건국되었고 34대 공양왕(恭讓王)까지 475년간 존속했다. 신라 말에 송악(松嶽:開城)의 토호(土豪)였던 왕건은 태봉(泰封)의 왕인 궁예(弓裔)의 부하로 있다가 918년 궁예를 추방하고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여 고려를 건국하였다. 개경(현 황해도 개성시)을 수도로 삼았으며 936년 후삼국시대를 형성하고 있던 한반도를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였다.
왕권에 비해 지방 토호 세력이 강력했지만 4대 광종에 이르러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중국, 일본과 교류하였고 멀리 아라비아와 페르시아까지 무역을 했다.
11세기에는 거란족의 침입을 받았으나 명장 강감찬의 귀주대첩(1019년)으로 이를 물리쳤고 대각국사 의천을 통해 불교가 본격적으로 유입되어 불교를 숭상하는 국가가 되었으며 불교의 가장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12세기에 들어 권력투쟁과 내분이 격화되어 무신정변이 일어나게 되었고 왕권이 약화되면서 병권을 가진 무신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13세기에는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의 침입을 받아 전 국토가 피폐화되었고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두산백과
105 점
본문 508 자
0
수호천사네츄럴
답변 채택률 18% 46
왕건 시대입니다~
76 점
본문 8 자
0
비공개
답변 채택률 비공개 25
왕건이 세운나라
74 점
본문 7 자
0
수호천사네츄럴
답변 채택률 18% 14
고려의 역사 8세기 말, 신라에서는 왕위쟁탈전이 빈번히 발생하여 정치가 혼란해졌고 전국 각지에서는 조세 수취에 반발하여 농민 봉기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지방 호족들이 신라 조정으로부터 독립하여 각자 자신의 세력을 키웠는데 그 중에서도 견훤과 궁예가 가장 강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이들은 주변 호족들을 통합하여,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건원칭제하기에 이르렀다. 견훤이 먼저 백제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백제를 세웠고(구별을 위해 보통 후백제로 부른다.), 뒤이어 궁예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의 고려를 세웠다(구별을 위해 후고구려로 부른다.). 이로써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 삼국이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 시기를 후삼국 시대라 부른다.
이후 궁예가 실정을 거듭하여, 민심을 잃고 쫓겨났다. 이에 918년 송악 지방의 호족 출신이었던 왕건은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임금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고, 송악(개성)으로 옮겼다. 고구려와 동일한 국호인 고려를 사용하여 고구려의 후계로 자처하는 데에는 왕건과 궁예가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왕건은 새로운 국가로서의 면목을 일신하기를 원하였으며, 그 목적으로 수도를 자기의 본거지로 옮겼다(919년 송악 천도). 이렇게 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치적·군사적 기반을 확고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호족으로서의 성격을 뚜렷이 나타내 주었다. 왕건은 또 대외 정책에서도 궁예와는 달리 친(親)신라 정책을 썼다. 견훤을 타도하기 위하여 신라와 우호를 맺은 것이다. 이는 또 한편 신라의 전통과 권위의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얻으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왕건이 군사적인 대(對)신라 정책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즉 금성(金城) 북(北) 50리의 땅에 신광진(神光鎭)을 설치하여 고려의 군사를 주둔케 하였던 것이다.
이런 왕건의 정책으로 말미암아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결국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귀순하고, 고려는 후백제를 멸망시켜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한편 926년 발해가 요나라의 침략을 받고 멸망하자, 왕족을 비롯한 유민들을 대거 받아들임으로서 발해에 이어 고구려를 계승한 한민족의 두 번째 왕조로 정통성을 확립하는 동시에 민족 통일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