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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웹튠 “타임슬립.” (아미동)
Magician
2025-12-29 15:00
조회수 : 27










타임슬립.(아미동)
가끔, 사람은 시간을 이기려고가 아니라 시간에게 지기 위해 옛 동네를 찾는다.
승부는 이미 끝났는데, 그래도 링 위에 올라가 “나 아직 살아 있다”는 얼굴 한 번 보여주려고.
겨울 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들던 날이었다. 어릴 적 살던 그 동네, 슬럼가라 부르든 달동네라 부르든—결국은 추위가 먼저 주소를 기억하는 곳.
아미동 산상교회 앞 구멍가게.
동네 초입엔 어디에나 있던 구멍가게가 아직도 있었다. 누가 보면 박물관이다. “1970년대” “1980년대” 라벨 붙여서 입장료 받아도 되겠다. 그런데 입장료가 뭔가. 여기선 늘 잔돈이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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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문은 겨울인데도 열려 있었다. 문을 닫아야 따뜻할 텐데, 그 집은 반대로였다. 닫으면 더 추워지는 집처럼 보였다.
머리 허연 노부부가 있었다. 둘 다 “노인”이라는 단어로는 모자라게 오래된 얼굴들. 아랫목 열선난로 앞에 이불을 반쯤 덮고 앉아, 허멀건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그 표정. 반가움인지 경계인지, 아니면 그냥… 눈이 그렇게 살아온 것인지.
내가 환갑을 넘었으니, 그 영감은 구순 가까이겠지.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는 게 반가운지 서글픈지, 그런 감정 분류는 늦었다. 가게 안 공기는 이미 “분류” 같은 건 포기한 냄새였다. 라면, 담배, 먼지, 그리고 세월이 눌러 붙은 단내.
나는 담배 하나와 캔커피를 주섬주섬 집어 들었다.
이 동네에서 캔커피는 음료가 아니라 **의식(儀式)**이었다. 따뜻한 것도 아니고, 시원한 것도 아니고, 늘 중간 어디쯤. 인생 같은 맛.
“잘 계시지요?!”
말은 튀어나왔는데, 누굴 향한 인사인지 나도 몰랐다. 노부부에게? 구멍가게에게? 아니면 어린 시절의 나에게?
그는 말없이 잔돈을 내밀었다. 그 손바닥에 놓인 동전들이, 이상하게도 “현재”의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동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차가운데, 그 차가움이 오늘은 더 현실적이었다.
캔커피를 들고 가게 앞 평상에 앉았다.
평상은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보였고, 사실은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평상은 대개 사람보다 오래 산다. 사람은 떠나지만, 평상은 기다리는 법만 배운다.
한 모금. 캔커피의 설탕이 혀에 닿자마자, 머리가 먼저 어릴 때로 넘어갔다.
참 이상하지. 타임머신이 뭐 거창한 엔진이냐. 내겐 늘 이랬다. 설탕 한 스푼, 담배 한 모금, 바람 한 줄기면 충분했다.
초딩 시절의 겨울이 떠올랐다.
남루한 옷. 친구들과 달리던 골목. 땅바닥에 얼음이 얇게 깔려 미끄러지던 날들.
눈을 살짝 옆으로 주면, 그 골목에서 누가 뛰고 있었다.
니와 동무들… 아니, 내 동무들. 내 입에서 “놀자 나온나!!“
가 튀어나오는 순간, 나는 이미 반쯤 과거로 걸어 들어가 있었다.
얼마나 추웠던가.
그 시절 난방이라고는 연탄불뿐이었다. 지금 사람들은 “연탄”을 낭만으로 말하지만, 솔직히 말해보자. 연탄은 낭만이 아니라 생존의 검은 덩어리였다.
연탄이 없으면 겨울은 그냥 “계절”이 아니라 “재난”이었다.
집에 오면 늘 아궁이에 걸터앉아 한동안 몸을 데웠다.
뜨거움이 살을 때리면 “아, 살아 있구나” 하고 느꼈다. 그런데 그 뜨거움은 오래 못 갔다. 연탄가스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면, 뜨거움은 곧 공포로 바뀌었다.
그래서 결국, 냉기를 겨우면한 스텐 밥공기 두 그릇만 달랑 놓인 아랫목으로 기어 들어갔다. 천장을 보다가, 깜빡 잠이 들곤 했다.
그때의 천장은 늘 어두웠고, 어두운 천장에는 생각이 잘 붙었다.
지금은 천장이 밝아도 생각은 안 붙는다.
나이 들수록 생각은… 미끄럽다. 얼음길처럼.
벙어리 장갑 하나 없이 홑겹 낡은 옷으로 가파른 언덕의 눈길을 오르내리던 날들도 기억난다.
가끔은 발이 미끄러져, 내 몸이 내 뜻과 상관없이 동네의 경사에 항복하던 날.
볼이 벌겋다 못해 얼어 시퍼렇게 변한 날.
그런 날들이 신기하게도, 지금은 아프기보다 선명하다.
사람은 고통을 잊는다는데, 나는 반대였다.
고통은 잊히지 않고, 대신 그 고통 속의 작은 빛이 떠오른다.
친구들이 웃던 얼굴, 눈을 털어주던 손, 집 앞에서 “야!” 하고 부르던 목소리 같은 것들.
나는 캔커피를 또 한 모금 들이켰다. 담배도 하나 꺼내 물었다.
연기가 올라가고, 나는 그 연기 사이로 시간을 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내 옆자리로 짐짝처럼 풀썩 주저앉았다.
“어이쿠…”
얕은 신음소리가, 바람보다 먼저 내 귀에 닿았다.
허연 머리가 삐쭉삐쭉 나온 영감. 빵모자. 시커먼 등산복.
술냄새를 풀풀 풍기며, 나를 째리듯이 쳐다봤다.
술냄새에는 특유의 “반항”이 있다. 세상 다 필요 없고, 나 하나만 살아 있으면 된다는 냄새.
순간, 보는 순간.
나는 그 얼굴에서 “아버지”를 봤다.
어릴 때 친구 성만이 아버지. 분명히 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가볍게 목례했다.
“성만이 아버지 아닌교?”
사투리가 나왔다. 사투리는 가끔 내가 아니라 동네가 내 입을 빌려 말하는 것 같다.
그 영감은 웃는 듯 마는 듯, 휑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만취한 듯, 내 인사를 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듣고도 모른 척하는지.
그저 무심했다. 무심함이 그 사람의 유일한 말처럼 보였다.
잠시 정적.
그 정적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했다.
이 동네의 대화는 원래 길지 않았다. 길게 말할수록 추위가 들어오니까.
그는 부시시 일어나 비틀거리며 구멍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소주 한 병 내봐라!”
그 뒷모습을 보는 순간, 내 머릿속에서 “쨍” 하는 소리가 났다.
금속이 금속을 치는 소리처럼.
아니,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처럼.
‘저걸… 저 말투를… 내가 왜 몰랐지?’
그때 깨달았다.
그가 “성만이 아버지”가 아니라, 만석이라는 걸.
내가 기억하던 성만은
늘 앞머리가 눈썹까지 내려오고, 입이 커서 웃으면 얼굴이 반쯤 없어지던 놈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술냄새 풍기는 빵모자 영감.
하지만 말투가, 걸음이, 어깨의 흔들림이…
그건 아버지가 아니라 그놈이었다.
세월이 오십 년도 더 흘렀는데, 나는 어린 시절의 추억에 빠져
세월의 간극을 잊고, 착각을 한 거였다.
그 착각이 우습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사람이 늙는 건 주름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 기억이 현실을 이기는 순간이 늘어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눈은 지금의 얼굴을 보면서도, 자꾸 옛 얼굴을 덧칠했다.
마치 낡은 필름 위에 새 영상을 억지로 겹치는 것처럼.
나는 담배를 한 번 더 빨았다.
연기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데, 이상하게도 그 연기는 과거로 내려갔다.
캔커피는 손에 들려 있고, 나는 평상에 앉아 있는데, 마음은 학교 가는 언덕길에 있었다.
가게 안에서 성만이 아니
영감이—소주를 받아 들고 나왔다.
그는 내 옆에 다시 털썩 앉지 않았다.
대신, 평상 끝에 걸터앉아 소주병을 바라봤다.
마치 병 안에 자신이 들어 있는 것처럼.
나는 입을 열까 말까 하다가, 결국 말하지 않았다.
“만석아”라는 한 단어가 목구멍에서 걸렸다.
그 한 단어를 뱉는 순간, 나는 다시 초등학생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반갑기만 한 일이 아니었다.
초등학생으로 돌아간다는 건, 그 시절의 추위도 같이 돌아오는 일이니까.
성만(나는 이제 마음속으로 그를 그렇게 불렀다) 소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숨이 하얗게 피어올라, 잠깐 내 눈앞에서 어릴 때의 입김이 되었다.
그때였다.
내 머릿속에서 또 하나의 장면이 튀어나왔다.
만석이와 내가 눈길에서 넘어지고, 서로를 놀리며 웃다가,
어른들 눈 피해 구멍가게 앞에서 과자 하나를 반씩 나눠 먹던 장면.
그 과자는 달았고, 그 달콤함은 그때 우리의 사치였다.
지금 캔커피가 달아 봤자, 그 사치의 맛은 아니다.
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
“니… 성만이가?”
말이 어색했다. 너무 늦게 꺼낸 이름은 항상 낯설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눈빛이 나를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왔다.
사람이 기억을 찾을 때의 그 눈빛.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물건을 더듬는 손처럼, 눈이 더듬거렸다.
그리고 아주 작게, 정말 거의 들리지 않게 말했다.
“…누고?”
그 한 마디에 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나는 그를 알아봤는데, 그는 나를 못 알아본다.
그 사실이 뭐랄까…
내가 시간여행을 해왔는데, 도착지가 나를 입장 거부하는 느낌이었다.
타임슬립이란 게 결국 이런 건가 보다.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과거를 내가 혼자 들고 오는 것.
“나… 니 친구… 그….”
내 말이 흐려졌다.
나는 이름을 말하지 못했다. 내 이름을 말하면, 이 동네는 또 나를 잡아당길 것 같았다.
어릴 때의 나, 가난했던 나, 추웠던 나, 그 모든 나들이 우르르 몰려와
내 현재의 어깨 위에 올라탈 것 같았다.
성민은
소주병을 한 번 더 들이켰다.
그리고 웃는 듯 마는 듯, 그 휑한 표정을 다시 지었다.
그 표정은 아까 내가 “성만이 아버지”라고 착각했을 때 보던 그 표정과 같았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아버지로 착각한 건 얼굴 때문이 아니었다.
그 표정 때문이었다.
세월이 사람에게 남기는 건 주름보다도, 표정의 습관이니까.
그는 중얼거렸다.
“친구… 다 갔지 뭐.”
그 말이 누굴 향한 건지 모른다. 나일 수도 있고, 자기 인생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로 친구들이 다 떠나버린 걸 말하는 걸 수도 있다.
나는 캔커피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캔커피는 여전히 미지근했다.
이상하게도 그 미지근함이 위로였다.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은 것.
인생이 다 그렇지.
극단으로 가면 부서진다.
어릴 때는 극단으로만 살았고, 늙으면 극단을 피하느라 또 지친다.
그 사이 어딘가가… 우리가 앉아 있는 이 평상 같은 곳일까.
나는 담배를 비벼 껐다.
“성만아 !.”
이번에는 제대로 말했다.
세상에, 이름 하나 부르는 데 오십 년이 걸렸다.
성만은
내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냥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다.
그 하늘은 내가 어릴 때 보던 하늘과 같지 않았다.
건물도 많아졌고, 전선도 더 얽혔고, 빛도 더 많아졌는데
그래도 하늘은 하늘이었다.
뭔가 늘었는데도, 뭔가는 그대로였다.
그는 천천히 일어났다.
비틀거리며, 그러나 자기만의 리듬으로.
그리고 가게 쪽으로 걸어가다 말고, 뒤돌아 나를 한 번 봤다.
그 눈빛에 아주 잠깐, 정말 잠깐—
내가 기억하는 성만이의
장난기 같은 게 스쳤다.
“춥다.”
그가 말했다.
그 말이 겨울을 말하는지, 세월을 말하는지, 인생을 말하는지 모르겠다.
그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 문틈에 사라지는 순간,
내 머릿속의 아이들이 골목에서 뛰어놀던 장면도 같이 사라졌다.
마치 영화 필름이 끝나고, 영사기가 ‘탁’ 하고 멈추는 것처럼.
나는 평상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
캔커피는 다 비었고, 손은 비었는데, 마음은 이상하게 무거웠다.
반가움도 서글픔도, 어느 하나로 딱 잘라 말할 수 없었다.
그 둘이 섞이면, 결국 남는 건 한 가지다.
“살아 있다”는 감각.
그 감각은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다.
미지근하다.
그리고 그 미지근함이, 오늘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시간이 나를 속인 게 아니다. 내가 시간을 속인 척했을 뿐이다.”
타임슬립은 기적이 아니라,
기억이 잠깐 현실을 덮어버리는 작은 착각.
하지만 그 착각 덕분에, 나는 오늘도 한 번 더
내가 어디서 왔는지—그리고 누구를 잃었는지—똑똑히 알게 되었다.
그 동네를 나서며, 나는 이상하게도 웃음이 났다.
세상에서 제일 웃긴 건 이거다.
오십 년을 살았는데도,
구멍가게 앞 평상에 앉으면
우리는 아직도 “초딩”이 된다.
추위 앞에서, 시간 앞에서,
다 똑같은 꼬마로.
#캡틴유La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