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
"바람이 많이 부는 날 읽기 좋은 책"(1)
축억
2025-12-11 15:00
조회수 : 23
창밖을 보고 있는 영미의 눈에는 알 수 없는 표정들이 오가고 있었다.
요즘에는 나이 탓인지 그렇게 좋아하던 장편 소설도 잘 읽히지 않아, 괜찮다는 커피숍들을 찾아다니며 커피 맛도 보고 우두커니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것으로 하루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때였다.
성균이 커피숍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영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숍을 막 들어서던 성균과 눈이 마주쳤다.
영미는 말 대신 성균의 손을 잡아 끌고 늦가을 정취가 한창인 거리로 안내했다.
한참을 그렇게, 주고받는 말 한마디 없이 둘은 질서 없이 나뒹구는 낙엽을 밟으며 걸었다.
마침내 성균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영미야, 오늘은 다른 날과 분위기가 다른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아니, 무슨 일은요. 아무 일도 없어요. 그냥 걷고 싶어서요.”
“그럼 다행이고.”
성균은 알고 있었다. 벌써 10년, 이제는 잊을 만도 한데 영미는 분명 지성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영미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처음 알게 해준 존재 ,
그래서일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마음속 깊은 곳에 세긴 사람의 이름은 그 의미도 존재도 지워지지 않나보다
여전히 영미는 10년 전 사랑했던 지성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성균은 차가워진 영미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영미의 손은 마치 어린아이의 손처럼 작았다.
“영미야, 너 책 좋아하지? 춥다. 우리 저기 ‘가벼운 책장’ 서점에 가볼래? 요 며칠 전 가보았더니 리모델링도 해서 좋더라고.”
“네, 그래요 오빠.”
가벼운 책장은 둘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서점이었다. 둘의 만남이 이곳에서 처음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했다.
그 뒤로 둘의 데이트 장소는 늘 카페 아니면 가벼운 책장 서점이었다.
이곳에는 신간부터 다양한 장르의 책들이 두루 구비돼 있었고
서점을 찾는 손님들이 마음대로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작지만 아기자기한 공간도 마련돼 있었다.
둘은 오늘도 책 한 권을 골랐다.
그리고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오빠, 난 요즘엔 복잡한 게 싫어. 그냥 단순한 게 좋은 것 같아.
충분히 복잡하게 살아서일까…”
혼잣말처럼 말끝을 흐리는 영미의 말에 맞장구라도 치듯
“나도 그래. 그냥 책장이 잘 넘어가는 책들이 좋더라고.”
둘은 함께 고른 책을 읽기 위해 책장을 넘겼다.
둘이 고른 책의 이름은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 읽기 좋은 책’이었다.
함께 책장을 넘기는 둘의 모습에서는 오래된 연인 같은 사랑스러운 분위기가 흘렀다.
성균은 여전히 자신의 주머니 안에서 꼼지락대는 영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성균은 내일도, 모레도 이렇게 영미와 함께할것 같다.
시간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지성의 대한 마음이 오늘은 또 얼마나 지워질 수 있을까
성균은 포기할 수 없는 꿈을 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