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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아침에 관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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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상지

2025-11-28 15:00

조회수 :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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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아침 / 이시영

아직 해가 뜨지 않은 남대문 광역버스 정류장

발가락이 삐져나온 운동화를 신은 노숙자 하나가

가로수에 기대어 떨고 있었다

안 보이는 손 하나가 다가와 그에게

따뜻한 천원짜리 한장을 쥐여주었다

- 이시영,『호야네 말』(창비, 2014)

겨울 아침 / 박형준

뜰에 부려놓은 톱밥 속에

어미 개가 강아지를 낳았다

햇살이 터오자 어미 개는

아직 눈도 뜨지 못하고

다리 힘없어 비틀거리는 새끼들을

혀로 세웠다

톱밥 속에 어미 개가

강아지를 낳은 겨울 아침

이쪽으로 쓰러지려 하면

저쪽으로 핥는 어미 개의

등허리에 서리가 반짝였다

서리에서 김이 나고 있었다

- 박형준,『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문학과지성사, 2011)

겨울 아침 / 안도현

눈 위에 콕콕 찍어놓은 새 발자국

비틀거리지 않고 걸어간 새 발자국

한 글자도 자기 이름을 남겨두지 않은 새 발자국

없어졌다, 한순간에

새는 간명하게 자신을 정리했다

내가 질질 끌고 온 긴 발자국을 보았다

엉킨, 검은 호스 같았다

날아오르지 못하고,

나는 두리번거렸다

- 안도현,『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창비, 2004)

겨울 아침 / 나희덕

어치 울음에 깨는 날이 잦아졌다

눈 비비며 쌀을 씻는 동안

어치는 새끼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친다

어미새가 소나무에서 단풍나무로 내려앉자

허공 속의 길을 따라

여남은 새끼들이 푸르르 단풍나무로 내려온다

어미새가 다시 소나무로 날아오르자

새끼들이 푸르르 날아올라 소나무 가지가 꽉 찬다

큰 날개가 한 획 그으면

模畫하듯 날아오르는 작은 날개들,

그러나 그 길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가 곧 오리라

저 텃새처럼 살 수 있다고,

이렇게 새끼들을 기르며 살고 있다고,

쌀 씻다가 우두커니 서 있는 내게

창밖의 날개 소리가 시간을 가르치는 아침

소나무와 단풍나무 사이에서 한 생애가 가리라

- 나희덕,『사라진 손바닥』(문학과지성사, 2004)

겨울 아침 / 조 은

발등을 덮는 눈 아래

얼어붙은 작은 발자국들

수북한 눈 위에

막 찍힌 발자국들

인간도 짐승도 싫어하는 자의

얼음 같은 눈빛도

녹일

발자국, 발자국들

잔돈을 세어

수도 요금 전기 요금 가스 요금이 빠져나가는

은행 잔고를 채우러 가는 아침

혼자 눈길을 걸어간

고양이의 길을 본다

나도 늘 혼자이다

누군가는 그것이 나의

약점이라고 말한다

약점은 때로 장점이어서

슬픔이나 막막함을

다른 이가

같이 겪지 않다도 된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기도 한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을 되돌아가

허기졌을 배가 눈 위로 끌린

새끼고양이의 길을 발로 다져준다

- 조은,『옆 발자국』(문학과지성사, 2018)

겨울 아침에 / 김기택

저녁에 머리맡에 두었던 냉수가

오늘 아침 그릇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물과 물 사이 추울수록 단단하게 껴안는 힘이

그릇을 쥔 내 손까지 붙들려고 한다

놀란 손이 얼떨결에 뿌리쳐 내던졌으나

그릇에서 떨어지거나 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투명한 강철의 울음 소리를 내고 있다

- 김기택,『태아의 잠』(문학과지성사, 1991)

겨울 아침에 / 이경호

얼음이 반쯤 깨진 웅덩이에

발을 담근 한 그루 나무

깨지지 않은 곳

하얀 핏발인데

아무도 발 담그지 않았다

깨지고 싶지 않아서

핏발 세워 살았다

저 얼음처럼 몸이 얼고

말이 얼고

가슴에 금 생기도록 살았다

깨지거라

부서져라

몸을 타고 넘는 말씀 한 바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가슴 깊은 곳 물이 돌아

겨울 아침이 후끈 달아오른다

- 이경호,『비탈』(도서출판 애지, 2014)

겨울 아침, 旌善 / 윤제림

얼굴 봤으면 됐지 뭐, 또 올게.

그때는 한 사나흘 자고 갈게.

시계를 가리키며 공연히 잰걸음으로 돌아나와서,

역전다방 창가에 붙어앉아 내려다보는 정거장 마당.

신발가게 주인은 귀마개 위로 장갑 낀 손을 붙이고 섰고,

추운데 저러고 싶을까, 검은 삽사리와

누렁이가 눈 위에서 한바탕 붙어 있다.

지금 막 계단을 내려간 다방 처녀는 맨종아리가

더 안쓰러운데, 연신 코트 깃만 고쳐 세우며

이발소 앞을 걸어가고 있다.

이발소 하얀 수건들이 철사줄에 붙어 있다.

정거장 마당 깨랑 콩이랑 말린 나물이랑

꼭 한 움큼씩 벌려놓은 여자는 두 무릎 새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

어서 기차 시간이 돼서 더러 팔렸으면 좋겠다.

아니,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 윤제림,『사랑을 놓치다』(문학동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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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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