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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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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상지

2025-10-24 15:00

조회수 :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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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 정일근​

청솔당聽蟀堂 나무우체통 열어보다 가을이 은현리 819번지 시인에게 보낸 긴 편지 한 장 받았습니다

- 귀뚜라미 한 마리.

- 정일근,『방!』(서정시학, 2013)

가을편지 / 김용택

귀뚜라미가 웁니다.

귀뚜라미 울면

이불을 끌어다 덮는 찬바람이 불지요.

벼들이 패고, 수수모가지에 참새들이 앉고, 억새가 핍니다.

하얀 억새가 바람에 나부끼는 강가에 가고 싶습니다.

강에 언덕에

그대 마음 가장자리에 잔물결이 와닿겠지요

강가에 서서

서쪽으로 지는 가을 하늘의 노을도 보고 싶고

노을이 빠진 강물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그 당신을요.

- 김용택,『속눈썹』(마음산책, 2011)

가을 편지 / 곽재구

여름에 태어난

피라미 한 마리

등에 작은 점 하나

어젯밤 편지 마지막 문장에 찍지 못한 마침표 같네

노란 물푸레나무 잎사귀 하나 떨구었더니

가만히 물고 몇 바퀴 도네

동그라미 안에

사흘 뒤 만나자 적었던

기차역 이름이 있네

- 곽재구,『푸른 용과 강과 착한 물고기들의 노래』(문학동네, 2019)

가을 편지 / 이성선

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고지처럼 하늘이 한 칸씩

비어가고 있습니다.

그 빈 곳에 맑은 영혼의 잉크물로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랑함으로 오히려

아무런 말 못하고 돌려보낸 어제

다시 이르려 해도

그르칠까 차마 또 말 못한 오늘

가슴에 고인 말을 이 깊은 시간

한 칸씩 비어가는 하늘 백지에 적어

당신에게 전해 달라 나무에게 줍니다.

- 이성선 외,『별 아래 잠든 시인』(문학사상사, 2001)

가을 편지 / 고정희

예기치 않은 날

자정의 푸른 숲에서

나는 당신의 영혼을 만났습니다.

창가에 늘 푸른 미류나무 두 그루

가을 맞을 채비로 경련하는 아침에도

슬픈 예감처럼 당신의 혼은 나를 따라와

푸른색 하늘에 아득히 걸렸습니다.

나는 그것이 목마르게 느껴졌습니다.

탁 터뜨리면 금세 불꽃이 포효할 두 마음 조심스레 돌아 세우고

끝내는 사랑하지 못할 우리들의 우둔한 길을 걸으며,

<형이상학>이라는 고상한 짐이 무거워

詩人인 나에게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당신을 내 핏줄에 실어 버릴 수만 있다면,

당신의 그 참담한 정돈을 흔들어 버릴 수만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다시 한번

이 세계 안의 뿌리를 일으켜 세울 수만 있다면,

하늘로 걸리는 당신의 덜미를 끌어내려

구만리 폭포로 부서져 흐르고 싶었습니다.

- 고정희,『이 시대의 아벨』(문학과지성사, 1983)

가을편지 / 고정희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가을이

흑룡강 기슭까지 굽이치는 날

무르익을 수 없는 내 사랑 허망하여

그대에게 가는 길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길이 있어

마음의 길은 끊지 못했습니다

황홀하게 초지일관 무르익은 가을이

수미산 산자락에 기립해 있는 날

황홀할 수 없는 내 사랑 노여워

그대 향한 열린 문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문이 있어

마음의 문은 닫지 못했습니다

작별하는 가을의 뒷모습이

수묵색 눈물비에 젖어 있는 날

작별할 수 없는 내 사랑 서러워

그대에게 뻗은 가지 잘라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무성한 가지 있어

마음의 가지는 자르지 못했습니다

길을 끊고 문을 닫아도

문을 닫고 가지를 잘라도

저녁 강물로 당도하는 그대여

그리움에 재갈을 물리고

움트는 생각에 바윗돌 눌러도

풀밭 한벌판으로 흔들리는 그대여

그 위에 해와 달 멈출 수 없으매

나는 다시 길 하나 내야 하나 봅니다

나는 다시 문 하나 열어야 하나 봅니다

- 고정희,『아름다운 사람 하나』(도서출판 푸른숲, 1996)

가을 편지 / 최영숙

가을, 하고 소리를 내어보면

떠날 준비를 하던 잎새가

문득 손을 놓고 돌아다본다

그래그래, 말은 못하고

서로 눈인사만을 전하며

우리는 헤어져야 하지

내가 가을 가을, 하고

자믈린 목젖을 겨우 울리면

어떻게 들었을까

가지 끝을 막 나서던 너는

허공에 잠시 멈추어 선다

반짝이는 가을 햇살이

네 몸을 감아내린다

가을, 가을, 가을, 하고

참을 수 없어 내가 소리치면

살의 무게 손바닥만한

지상의 무게가 너무도

가벼워 가벼워 너는

몸을 떨군다 우수수수수

물든 잎들 앞을 가린다

빈 가지와 가지 사이에

새들은 새로이 둥지를 틀고

속 푸른 네 목숨 다 받아간

하늘을 보며

가으내 나는 발을 빠뜨린다

- 최영숙,『골목 하나를 사이로』(창작과비평사, 1996)

다시 가을 편지 / 한승원

그 누구인가가

허공에 늘어뜨려놓고 있는

사천팔만억 개의 유리 구슬 주렴 속으로

천리 밖의 섬이 옹기종기 모여들고

질펀한 청자빛 바다 물너울 위에서

눈부신 태양 빛살과

수억천 마리 금빛 고기들이 혼례 치르고 있는

내 공화국의 정원으로

그대의 먼지 앉은 음습한

영혼 보내주십시오

보송보송하게 해바라기하여 보내드릴게요.

- 한승원,『노을 아래서 파도를 줍다』(문학과지성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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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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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선님의 가을 편지가 제 픽이네요 ㅎㅎ 좋은 주말 되세여

    여우비DotDotD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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