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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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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상지

2025-10-15 15:00

조회수 :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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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 이시영

잠자리 한 마리가 감나무 가지 끝에 앉아

종일을 졸고 있다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차가운 소나기가 가지를 후려쳐도

옮겨가지 않는다

가만히 다가가 보니

거기 그대로 그만 아슬히 입적하시었다

- 이시영,『무늬』(문학과지성사, 1994)

가을날 / 문태준

그루터기만 남은 가을 옥수수밭에서

옥수수 그루터기를 캐내다보면 하루가 검고 거칠게 저물어요

그러나 나는 기억해요

수직으로 자라 내뻗던 옥수숫대 위에 서걱대던 물살을

옥수수의 익살스런 말과 바람의 웃음을

- 문태준,『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문학동네, 2018)

가을날 / 김사인

좋지 가을볕은

뽀뿌링 호청같이 깔깔하지.

가을볕은 차

젊은 나이에 혼자된 재종숙모 같지.

허전하고 한가하지.

빈 들 너머

버스는 달려가고 물방개처럼

추수 끝난 나락 대궁을 나는 뽁뽁 눌러 밟았네.

피는 먼지구름 위로

하늘빛은

고요

돌이킬 수 없었네

아무도 오지 않던 가을날.

- 김사인,『어린 당나귀 곁에서』(창비, 2015)

가을날 / 정현종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가을 저 맑은 날과

숨을 섞어

가없이 투명하여

퍼지고 퍼져

천리 만리 퍼져나가는

이 쓸쓸함은 무엇인가.

감자나 캐라

벼나 베라 하는 소리

들리지 않는 바 아니나

용서하라 이 가없는 虛鬼,

감자를 캐도 근절은 안 되고

배불리 삶아 먹어도 천만에

채워지지 않을

이 쌩ㅡ 한

머나먼 적막을.

- 정현종,『세상의 나무들』(문학과지성사, 1995)

가을날 / 이병률

이사를 한다

나도 모르는 이사를 하고

싼 적 없는 이삿짐을 푼다

언제부턴가 그리 되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의 이사

명치께에서 명치 끝으로의 이사

생각에서 생각으로의 이사

이상하게 그때는 항상 가을이었다

그 가을이었다

낯선 곳에다 짐을 내려놓고는

잠깐 자려고 눈을 붙였다가 떴는데

창문 바깥 해바라기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어서 놀랐다

벌써 저녁이 넘어가고 있었다

우연히 마주친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해바라기가 잠든 나를 불쌍하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거나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찾기 위해 일어나 앉아서는

조금 걸어야 한다고 마음으로만 생각했다

해는 없고 해바라기만 떠 있었다

마음에 파고들어와 아프게 드나드는 그 감정이 하도 쓰르르해서

나는 나를 건드려 발기시켰다

- 이병률,『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문학동네, 2020)

가을날에는 / 최하림

물 흐르는 소리를 따라 넓고 넓은 들을 돌아다니는

가을날에는 요란하게 반응하며 소리하지 않는 것이 없다

예컨대 조심스럽게 옮기는 걸음걸이에도

메뚜기들은 떼지어 날아오르고 벌레들이 울고

마른 풀들이 놀래어 소리한다 소리들은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시간 속으로 흘러간다 저만큼 나는

걸음을 멈추고 오던 길을 돌아본다 멀리

사과 밭에서는 사과 떨어지는 소리 후두둑 후두둑 하고

붉은 황혼이 성큼성큼 내려오는 소리도 들린다

- 최하림,『풍경 뒤의 풍경』(문학과지성사, 2001)

어느 조그만 가을날 / 황동규

이제 무엇을 더 버려야 할 것인가?

마음의 집도 팔고

아직 거느려보지 못한 책들도 모두 팔고

빈 봉우리 하나쯤 소유하고 싶다

잔뿌리 덮인 저녁하늘 한편에는

해가 굴러가고

나머지에선

온통 바람이 분다

私的으로 분다

두 눈이 지워진 돌의

얼굴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딸애는 자꾸 꼬마귀신이라 부르지만

바람 속에 자세히 보면

내 얼굴이다.

- 황동규,『견딜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문학과비평사, 1988)

이 환장하게 환한 가을날 / 황동규

이 환장하게 환한 가을날 화왕산 억새들은

환한 중에도 환한 소리로 서걱대고 있으리

온몸으로 서걱대다 저도 모르게

속까지 다 꺼내놓고

다 같이 귀 가늘게 멀어 서걱대고 있으리.

걷다 보면 낮달이 계속 뒤따라오고

마른 개울 언저리에

허투루 핀 꽃 없고

새소리 하나도 묻어 있지 않은 바람 소리

누군가 억새 속에서 환하게 웃는다.

내려가다 처음 만나는 집에 들러

물 한 잔 청해 달게 마시고 한 번 달게 웃고

금세 바투 몰려드는 무적(霧笛) 같은 어스름 속

무서리 깔리는 산길을

마른 바위에 물 구르듯 내려가리.

- 황동규,『사는 기쁨』(문학과지성사, 2013)


1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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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이병률님의 시가 맘에 드네요

    여우비DotDotD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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