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
초원에 관한 시
흑치상지
2025-09-17 15:00
조회수 : 33
초원(草原) / 신경림
지평선에 점으로 찍힌 것이 낙타인가 싶은데
꽤 시간이 가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무토막인가 해서 집어든 말똥에서
마른풀 냄새가 난다.
짙푸른 하늘 저편에서 곤히 잠들었을
별들이 쌔근쌔근 코 고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다.
도무지 내가 풀 속에 숨은 작은 벌레보다
더 크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가 가서 살 저세상도 이와 같으리라 생각하니
갑자기 초원이 두려워진다.
세상의 소음이 전생의 꿈만 같이 아득해서
그립고 슬프다.
- 신경림,『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
저 푸른 초원 / 이규리
풀밭에서 종일 풀을 뜯고 있자면
소가 풀밭이 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누워서 하늘을 다 차지하는 근원이 되고 싶기도 할 것이다
풀밭을 뺏으면 더는 할 일이 없을 것처럼
소는 제 그림자까지 쥐어뜯고 있는데
종일 풀을 뜯고 있다고 소의 고민이 줄어드는 건 아닐 것이다
당신이 내 고민을 뜯어갔어도 소가 지나간 풀밭처럼
어둠의 반경은 넓어졌다
무성한 음모를 밀고 나니 남자가 떠났다는 선배는
자신의 머리를 밀었다
생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밀었다
삭발한 머리에서 새순이 나올 때의 촉감은
까칠한 갈등이었다는데
먹옷 안에 자신의 풀밭을 감추어두자면 얼마나 따가웠을까
생이 너무 무료해서
어쩌면 풀밭이 소를 따라왔는지 모른다
벗어야 할 업은 지금 넓디넓어서
전생은 따로 둘 게 없을 것이다
- 이규리,『최선은 그런 것이에요』(문학동네, 2014)
흐르는 초원 / 신대철
하라호룸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다리 밑 풀밭에서 나는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낙타 몇 마리에 가재도구와 보따리를 싣고 목민 한 가족이 개울을 건너오고 있었습니다. 풀을 찾아간다고 하였습니다. 햇볕에 살짝 그을린 아이들 볼웃음이 싱그럽게 바람에 날려왔습니다. 아이들은 양떼에 섞여 떠 있는 듯 걸었습니다.
낙타와 양 떼와 목민들 자취를 따라
초원이 줄기를 이루어 흐르고 있었습니다.
흐르는 초원에 노란빛에
나는 가만히 누웠습니다.
풀벌레 같은 무슨 소리들이
쇳덩이 몸을 가볍게 들어올리곤 하였습니다.
- 신대철,『바이칼 키스』(문학과지성사, 2007)
옮겨가는 초원 / 문태준
그대와 나 사이 초원이나 하나 펼쳐놓았으면 한다
그대는 그대의 양떼를 치고, 나는 나의 야크를 치고 살았으면 한다
살아가는 것이 양떼와 야크를 치느라 옮겨다니는 허름한 천막임을 알겠으니
그대는 그대의 양떼를 위해 새로운 풀밭을 찾아 천막을 옮기고
나는 나의 야크를 위해 새로운 풀밭을 찾아 천막을 옮기자
오후 세시 지금 이곳을 지나가는 구름 그림자나 되어서
그대와 나도 구름 그림자 같은 천막이나 옮겨가며 살자
그대의 천막은 나의 천막으로부터 지평선 너머에 있고
나의 천막은 그대의 천막으로부터 지평선 너머에 두고 살자
서로가 초원 양편으로 멀찍멀찍이 물러나 외면할 듯이 살자
멀고 먼 그대의 천막에서 아스라이 저녁연기가 피어오르면
나도 그때는 그대의 저녁을 마주 대하고 나의 저녁밥을 지을 것이니
그립고 그리운 날에 내가 그대를 부르고 부르더라도
막막한 초원에 천둥이 구르고 굴러
내가 그대를 길게 호명하는 목소리를 그대는 듣지 못하여도 좋다
그대와 나 사이 옮겨가는 초원이나 하나 펼쳐놓았으면 한다
- 문태준,『먼 곳』(창비, 2012)
초원의 빛 / 송찬호
그때가 유월이었던가요
당신이 나를 슬쩍 밀었던가요
그래서 풀밭에 덜렁 누웠던 것인데
초록이 나를 때렸죠
등짝에 찰싹, 초록 풀물이 들었죠
나는 왠지 모를 눈물이 핑 돌아
벌떡 일어나, 그 너른
풀밭을 마구 달렸죠
초록 신발이 벗겨지는 것도 몰랐죠
숨은 가쁘고 바람에 머리는 헝클어졌죠
나는 그때, 거의, 사랑에 붙잡힐 뻔했죠
언덕에서 느릅나무는 이 모든 걸 보고 있었죠
한낮의 열기 속에서
초록은 꽁지 짧은 새들을 때렸죠
키 작은 제비꽃들도 때렸죠
더 짙고 아득한 곳으로 질주하는
한줄기 어떤 청춘의 빛이 있었죠
- 송찬호,『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 2009)
초원의 별 / 신경림
몽골에서
닥지닥지 하늘에 붙은 별무리에서
낮게 떨어져내려온 저 별에
나 같은 사람 하나 살고 있나보다,
평생을 두고 해온 일 문득 부질없어
그 허전함 메우리라 이 먼 나라까지 와서도
이번에는 그것도 부질없어 저녁 한나절을
낮잠으로 보내는 나를 한밤중에 몰래
불러내는 것을 보면.
듬성듬성 초원에 핀 꽃들을 보게 하고
조랑말처럼 초원에서 뒹구는
날렵한 두 처녀 활기찬
웃음소리를 듣게 하는 것을 보면.
외진 장터에서도 후미진 산속에서도
찾지 못했던 나 같은 사람 또 하나
저 별에 살고 있나보다,
모든 걸 버리리라 이 먼 나라까지 와서도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는 나와 밤새
동무가 되어주는 것을 보면.
- 신경림,『낙타』(창비, 2008)
몽골 초원에서 / 박영근
외줄기, 하얗게 빛나는 길이
느리게 초원을 가다
지평선 속으로 사라진다
하늘에도 바람 속에도 내가 기어 부를 노래는 없다
저 홀로 깊어져 푸르러갈 뿐
바람이 기르는 몇떼의 구름도 이내 흩어진다
그리고 여기, 시간은 있는가
가없는 초원에
한낮에 풀들이 마르고
앉은뱅이 쑥부쟁이는 이미 천년 전에 꽃을 피우고
타는 정적 속에서
말들이 강물을 건너간다
바람소리
바람소리
저 불어오는 바람은 무지(無知)일 뿐이다
저도 모른 채 돌 하나의 순한 침묵으로 돌아갈 뿐이다
붉은 구름이 밀려가는 저녁으로 돌아가던 낙타가
내가 온 길을 무심히 바라본다
- 박영근,『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창비,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