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
풍경(風景)에 관한 시
흑치상지
2025-08-29 15:00
조회수 : 46
풍경 / 이시영
아카시아들이 다투어 포도 위에 샛노란 꽃방석을 깔았다
아가씨들보다 아가씨들 품에 안긴 개들이 먼저 사뿐히 뛰어내린다
이런 날 아스팔트도 단 한번 인간의 얼굴을 한다
- 이시영,『무늬』(문학과지성사, 1994)
풍경 / 김용택
소나무 등에 기대고 서서 내 입술을 받아들이던 달콤한 그대 입술, 새들이 가만히 날아오르고 솔숲에 새어든 햇살을 온몸에 받으며 내 등 뒤에서 급실 같은 솔 이파리들이 천천히 허공을 지나던 그 소리, 찬란하게 다가오던 그대 얼굴, 오! 수줍어 몸 사리며 파르르 파고들던 그 모습
파란 하늘이 보이거나
비가 내리거나
내 마음에 그려지는 풍경은 그 그리운 강 언덕 솔밭이랍니다.
이 비가 눈으로
바뀔 거라지요.
가랑잎같이 붉던 그대 얼굴이 젖어옵니다.
- 김용택, 『속눈썹』(마음산책, 2011)
풍경 / 류근
보리밭 끝에 자전거를 멈추고
아들과 함께 나는 하늘을 보네
구름은 가볍게 은비늘을 펼치며 흘러가고
찔레꽃은 이미 청춘을 지나
돌이킬 수 없는 시절 쪽으로 깊어져 있네
얼마나 먼 길을 떠돌아서
나는 비로소 이 길에 자전거를 멈추었나
세상의 언어를 모르는 아들 입술에
종달새 같은 지저귐이 반짝 빛나고
세상을 향해 굳어진 내 어깨 위로
보리밭은 황금의 숨결을 내려놓네
너무 늦게서야 나는 나의 괴로운
자전거 바퀴를 멈춘 게 아닌가
보리밭 두던에 가만히 자전거를 기대어 두고
어린 아들의 손바닥 위에 나는
말없이 보리 이삭 한 개를 쥐여주네
- 류근,『상처적 체질』(문학과지성사, 2010)
무심풍경 / 복효근
겨울 감나무 가지가지에
참새가 떼로 몰려와
한 마리 한 마리가 잎이 되었네요
참, 새, 잎이네요
잎도 없이 서 있는 감나무가 안쓰러워
새들은 이 가지 저 가지 옮겨 앉으며
작은 발의 온기를 건네주기도 하면서
어느 먼 데 소식을 들려주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나무야 참새가 그러든지 말든지 하는 것 같아도
안 자고 다 듣고 있다는 듯
가끔씩 잔가지를 끄덕여주기도 합니다
나무가 그러든지 말든지
참새는 참 열심히도 떠들어 댑니다
모른 체 하고 그 아래 고양이도 그냥 지나갑니다
나무는 나무대로 참새는 참새대로
모두 다 무심한 한 통속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제 길 갑니다
연말인데 벌써 몇 개월 전화 한 통 없는 친구에게
한바탕 욕이나 해줄까 했다가 잊어버리고
저것들의 수작을 지켜보며
이 한나절에 낙관 꾹 눌러
표구나 해뒀으면 싶었습니다
- 복효근,『마늘촛불』(애지,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