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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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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상지

2025-07-24 15:00

조회수 :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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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 정세훈

녀석이 나보다

부잣집 아들이었다는 것도

학업을 많이 쌓았다는 것도

돈을 많이 벌었다는 것도

그 어느 것 하나 부럽지 않았다

다만, 녀석이

내 끝내 좋아한다는 그말 한마디

전해지 못했던 그녀와

한 쌍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적

난 그만

녀석이 참으로 부러워

섧게 울어버렸다

- 정세훈,『우리가 이 세상 꽃이 되어도』(푸른사랑, 2018)

첫사랑 / 서정춘

가난뱅이 딸집 순금이 있었다

가난뱅이 말집 춘봉이 있었다

순금이 이빨로 깨트려 준 눈깔사탕

춘봉이 받아먹고 자지러지게 좋았다

여기, 간신히 늙어버린 춘봉이 입 안에

순금이 이름 아직 고여 있다

- 서정춘,『물방울은 즐겁다』(천년의시작, 2010)

달맞이꽃 / 이홍섭

한 아이가 돌을 던져놓고

돌이 채 강에 닿기도 전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던

돌 같던 첫사랑도 저러했으리

그로부터 너무 멀리 왔거나

그로부터 너무 멀리 가지 못했다

- 이홍섭,『숨결』(현대문학북스, 2002)

니가 좋으면 / 김해자

가끔 찾아와 물들이는 말이 있다

두레박 만난 우물처럼 빙그레 퍼져나가는 말

전생만큼이나 아득한 옛날 푸른 이파리 위에

붉은 돌 찧어 뿌리고 토끼풀꽃 몇 송이 얹어

머스마가 공손히 차려준 손바닥만한 돌 밥상 앞에서

이뻐, 맛있어, 좋아,

안 먹고도 냠냠 먹던 소꿉장난처럼

덜 자란 풀꽃 붉게 물들이던 말

덩달아 사금파리도 반짝 빛나게 하던

니가 좋으면 나도 좋아,

말한 게 다인 말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말

나만 얻어먹고 되돌려주지 못한

니가 좋으며 나도 좋아,

붉은 돌에 오소록 새겨진

- 김해자,『집에 가자』(도서출판 삶창, 2015)

사금파리 / 정우영

예전에 쓰던 오래된 장롱 서랍 밑바닥에서

마음에 박혀 있던 사진 하나가 불쑥 걸어나옵니다.

사금파리 반짝이는 봉숭아 뜨락 앞에서

찢어진 꼬까 고무신이 잔뜩 주눅들어 있습니다.

그 애는 이미 능숙한 일곱살짜리 색시였습니다. 사금파리 위에 무엇을 올려놓든 화려한 밥상이 되었습니다. 그 조그마한 손놀림이 마술을 부리는지 흙은 밥이 되고 봉숭아잎은 맛있는 나물이 되었습니다. 그 애가 살짝 웃으면 나는 이미 넉넉히 배가 불러서 그 애의 무릎을 베고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매끈매끈한 무언가가 내 얼굴을 스치는 것 같아 눈떠 보면 그 애의 해사한 눈동자가 깜짝이지도 않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내 샅을 타고 찌르르 전기가 흐르고 다급해진 나는 깜짝 오줌을 지리곤 했습니다.

어느날 새벽, 스르르 사라져버린 그 애를 붙잡고 묻습니다.

너는 시방 어떤 곡절을 못 견디며 헤쳐가고 있느냐.

애장터에 꿈을 누인 사금파리 내 색시야 .

- 정우영,『집이 떠나갔다』(창비, 2005)





쑥부쟁이 연가 / 복효근

그 가시내와 내가

그림자 서너 배쯤 거리를 두고

하굣길 가다보면

마을 어귀

쑥부쟁이 너울로 핀 산그늘에

가시내는 책보를 풀어놓고 아예

가을 다 가도록

꽃이 몇 송인지 한참이나 꺾다간

뒤도 안 돌아보고 가곤 했었지

저만치 뒤에 쪼그리고 앉아

가시내 스치는 손끝에 내 마음도 피어서

꺾이는 저 쑥부쟁이 꽃빛깔

꽃빛깔로 달아오르곤 했었지

세월도 그 가시내

무심한 눈길 몇 번 마냥 흘러서

마을 어귀 지날 때

시방은 누가 거기 홀로 피어 울고 있는지

쑥부쟁이,

쑥부쟁이 너울로 핀

산그늘에

- 복효근,『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 (달아실출판사, 2017)

찔레꽃은 피고 / 신경림

이웃 가게들이 다 불을 끄고 문을 닫고 난 뒤까지도 그애는 책을 읽거나 수를 놓으면서 점방에 앉아 있었다. 내가 멀리서 바라보며 서 있는 학교 마당가에는 하얀 찔레꽃이 피어 있었다. 찔레꽃 향기는 그애한테서 바람을 타고 길을 건넜다.

꽃이 지고 찔레가 여물고 빨간 열매가 맺히기 전에 전쟁이 나고 그애네 가게는 문이 닫혔다. 그애가 간 곳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오랫동안 그애를 찾아 헤매었나보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애가 보이기 시작했다. 강나루 분교에서, 아이들 앞에서 날렵하게 몸을 날리는 그애가 보였다. 산골읍 우체국에서, 두꺼운 봉투에 우표를 붙이는 그애가 보였다. 활석 광산 뙤약볕 아래서, 힘겹게 돌을 깨는 그애가 보였다. 서울의 뒷골목에서, 항구의 술집에서, 읍내의 건어물점에서, 그애를 거듭 보면서 세월은 가고, 나는 늙었다. 엄마가 되어 있는, 할머니가 되어 있는, 아직도 나를 잊지 않고 있는 그애를 보면서 세월은 가고, 나는 늙었다.

하얀 찔레꽃은 피고,

또 지고.

- 신경림,『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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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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