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
오솔길
흑치상지
2025-07-11 15:00
조회수 : 38
오솔길 / 문태준
오솔길을 걸어가며 보았네
새로 돋아난 여린 잎사귀 사이로 고운 새소리가 불어오는 것을
오솔길을 걸어가며 보았네
햇살 아래 나뭇잎 그림자가 묵화를 친 것처럼 뚜렷하게 막 생겨나는 것을
오솔길을 걸어가 끝에서 보았네
조그마한 샘이 있고 샘물이 두근거리며 계속 솟아나오는 것을
뒤섞이는 수풀 속에서도 이 오솔길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었네
- 문태준,『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문학동네, 2018)
오솔길 / 장석주
골짜기로 내려가는 좁은 길에 서 있다
인생의 많은 망설임들로
잎새들은 서걱거리고
해는 지평선 너머로 넘어진다
수만 번도 더 왔던 낯선 너무나 낯선
황금빛 저녁
바람이 지나간 뒤 세상이 고요해지면
나도 고요해지리라
종일 햇볕에 깨끗하고 하얗게 말린
내 뼈도 고요해지리라
저기, 저기
정말 조그만 빗방울들이
기적처럼
네 흰 발목을 적시며 온다, 오솔길 위에
아아, 이제 흐르는 물 위에
우리들의 집을 지어도 좋다
- 장석주,『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세계사, 1998)
강변의 오솔길 / 박형준
물속에 손거울이 있습니다
옛날 내 애인이 빠뜨린 것입니다
오수(午睡)에 빠진 날엔 머리맡에 앉아
내 귀를 만지면서 음을 만들고 있어요
당신이 깨어서도 잊지 못할 체온으로
언약을 빚고 있어요
그 옛날의 소리가 기포처럼 올라옵니다
한때는 모든 여자가 아가씨이던 시절
나는 더러운 손으로 빛이 힘겹게 싹트는,
애인의 쪽방 창 너머로 나뭇가지를 보며
백 년이 가도 깨지지 않을 손거울을 만들었습니다
비 오는 날엔
천장에 튤립 같은 곰팡이가 슬었고
햇빛 맑은 날엔
행주로 닦아내었습니다
당신이 떠나간 뒤
나는 우리가 함께 있던 유일한 공간인
침대에 올라가 발끝을 들고
손거울에 뜨던 별을 바라보았습니다
물속은 아직 어둡지만
오리 물갈퀴가 어떻게 생겼는지
나는 계절이 지나가기 전 상상합니다
손거울의 음이 듣고 싶은 날엔
강변의 오솔길을 걸어
물속의 무지개를 바라봅니다
- 박형준,『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창비, 2020)
오솔길을 염려함 / 장석남
나는 늘 큰길이 낯설므로
오솔길을 택하여 가나
어머니는, 내가 가는 길을 염려하실 테지
풀이 무성한 길, 패랭이가 피고 가을이라
나뭇잎이 버스럭대고 독한 뱀의 꼬리도 보이는
맵디매운 뙤약볕 속으로 지워져가는 길
어느 모퉁이에서
땀을 닦으며 나는 아마 나에게
이렇게 질문해볼 거야
나는 어찌하여 이, 뵈지도 않는 길을 택하여 가는가?
어머니의 기도를 버리고 또
세상의 불빛도 아득하게
누군가 내 속에서 이렇게 답하겠지
내가 가는 것이 아니고 이 길이, 내 발 앞으로, 가슴속으로,
눈으로 와 데려가고 있다고
가을 아침의 자욱한 첫 안개와
바짓단에 젖어오르는 이슬들도
오래전부터 아는 듯 걸어갈 테지
어머니의 염려나 무거워하면서 여전히 걸어갈 테지
안개 속으로 난 아득한 오솔길을
- 장석남,『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문학동네, 2012)
오솔길의 몽상 3 / 고재종
고요도 익으면
도토리 몇 톨은 떨구는가
쓸쓸함도 사무치면
붉나무 잎새쯤은 물들이는가
오롯하다는 것
풀덤불 헤치면 거기
새새끼 다 날아가 버린 뒤의
텅빈 둥지 같은 것
어미새가 우짖고 나면
더욱 고요하리
풀줄기가 스적이고 나면
더욱더 쓸쓸하리
오롯하다는 것
푸른 항변에 지친 억새밭은
이젠 잔광에 반짝이거나
소슬바람에 쓸리는 것
- 고재종,『쪽빛 문장』(문학사상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