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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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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상지

2025-07-05 15:00

조회수 :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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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날 / 천양희

작은 꽃이 언제 다른 꽃이 크다고 다투어 피겠습니까

새들이 언제 허공에 길 있다고 발자국 남기겠습니까

바람이 언제 정처 없다고 머물겠습니까

강물이 언제 바쁘다고 거슬러 오르겠습니까

벼들이 언제 익었다고 고개 숙이지 않겠습니까

아이들이 해 지는 줄 모르고 팽이를 돌리고 있습니다

햇살이 아이들 어깨에 머물러 있습니다

무진장 좋은 날입니다

- 천양희,『너무 많은 입』(창비, 2005)

​​

볕 좋은 날 / 이재무​

​볕 좋은 날

사랑하는 이의 발톱을 깎아주리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부은 발등을

부드럽게 매만져 주리

갈퀴처럼 거칠어진 발톱을

알뜰, 살뜰하게 깎다가

뜨락에 내리는 햇살에

잠시 잠깐 눈을 주리

발톱을 깎는 동안

말은 아끼리

눈 들어 그대 이마의 그늘을

그윽하게 바라다보리

볕 좋은 날

사랑하는 이의 근심을 깎아주리

​ - 이재무,『데스밸리에서 죽다』(천년의시작, 2019)

​​

볕 좋은 날 / 오정숙

봄을 곁눈질하던 감나무

슬레이트 지붕의 햇살 끌어당기고

봄바람도 나른한 오후를 즐기는데

젖은 몸을 눕히는

털신 한 켤레

지난겨울

빈 둥지 홀로 지키던

감나무 집 할아버지

군불 지펴 아랫목 데워놓고

사립문 밖 발자국 소리에 귀 기울여 보지만

들리는 건 살을 에는 바람소리뿐

할아버지 마음에도 찬바람만 불었다

털신조차 추위를 막아주지 못했던

눅눅한 시간들

봄볕 위에 올려놓고

그 겨울을 하나씩 말리는 중이다

- 오정숙,『기다림이 사는 집』(가온, 2018)

​​

어느 볕 좋은 날 / 문계봉

- 힘내요 태인씨

태인 씨, 웃는다 웃음의 순도(純度) 만큼 세상에 미세한 파문이 인다 공기의 미동(微動)에 놀란 나무 위 새들은 일제히 하늘로 날아오르고 미처 잎을 달지 못한 나뭇가지들 수런거린다 태인 씨의 눈빛과 호흡의 사정거리 안에서 그녀의 눈물과 한숨을 보아 왔던 사물들, 웃는다 웃으면서 비로소 안심한다.

- 문계봉,『너무 늦은 연서』(실천문학사, 2017)

날마다 좋은 날 / 임보

비가 온다 하면

파전 거리 장만하고

날이 갠다 하면

낚싯대 손질하고

바람 분다 하면

처마 끝에 풍경 달고

눈이 온다 하면

유리창 닦아 놓고

​ - 임보,『山上問答』(도서출판 시와시학, 2016)

​​

운수 좋은 날 / 최영미

단골식당에 12시 전에 도착해

번호표 없이 점심을 먹고

서비스로 나온 생선전에 가시가 하나도 없고

파란불이 깜박이는 동안 횡단보도를 무사히 건너

"환승입니다" 소리를 들으며

(교통비 절약했다!)

버스에 올라타

내가 내릴 곳을 지나치지 않고

내가 누르지 않아도 누군가 벨을 눌러

뒤뚱거리지 않고 착지에 성공해

신호에 한 번도 걸리지 않고

익숙한 콘크리트 속으로 들어가

배터리가 떨어졌다는 경고음 없이

현관문이 스르르 열리는 날

- 최영미,『공항철도』(이미출판사, 2021)

​​

오늘은 죽기 좋은 날 / 김인육

오늘은 죽기 좋은 날

모든 생명체가 나와 조화를 이루고

모든 소리가 내 안에서 합창을 하고

모든 아름다움이 내 눈 속에 녹아들고

모든 사악함이 내게서 멀어졌으니

오늘은 죽기 좋은날

나를 둘러싼 저 평화로운 땅

마침내 순환을 마친 저 들판

웃음으로 가득한 나의 집

그리고 내 곁에 둘러앉은 자식들

그렇다 오늘이 아니면 언제 떠나겠는가

라고,

노래하는 타오스족 인디언처럼

내 영혼이 깃털처럼 가벼워진 어느 날

찰칵

이 세상 마지막 풍경을 담은 눈동자

비문인 양 석양에 쏘아두고

나 기꺼이 죽기로 하다

죽어서 영원히 행복하기로 한다

오늘은 죽기 좋은 날

정녕 죽어서 복된 날

죽자!

열망이여, 목숨이여!

하지만

최후의 찰나 내 그리움은

컹컹

팔려가던 개처럼 목줄을 끊고

필사적으로 죽음에서 도망쳐 온다

오늘은 죽기 좋은 날

그래서

살기엔 더욱 좋은 날

살자!

열망이여, 빛나는 목숨이여!

오늘은 살기 좋은 날

모든 생명체가 나와 조화를 이루고

모든 소리가 내 안에서 합창을 하고

모든 아름다움이 내 눈 속에서 녹아들고

모든 잡념이 내게서 멀어졌으니

오늘은 살기 좋은 날

나를 둘러싼 저 평화로운 땅

다시 순환을 시작하는 저 들판

웃음이 가득한 나의 집

그리고 내 곁에 둘러앉은 아내와 자식들

그렇다, 삶이 축복이 아니면 무엇이 그것이겠는가.

-김인육,『사랑의 물리학』(문학세계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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