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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루비아 그리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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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상지

2025-06-27 15:00

조회수 :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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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루비아 / 신현정

꽃말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사루비아에게

혹시 병상에 드러누운 내가

피가 모자랄 것 같으면

수혈을 부탁할 거라고

말을 조용히 건넨 적이 있다

유난히 짙푸른 하늘 아래에서가 아니었는가 싶다

사루비아, 수혈을 부탁해.

- 신현정,『화창한 날』(세계사, 2010)

사루비아 / 이창수

오지랖 넓은 수탉이

배추벌레 찾아 마당 헤집고

단청 밑엔 어머니 말씀대로

하는 일 없이 날마다 돈만 까먹는 냉장고가

파김치 한 포기 담고

오늘도 배앓이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이테가 아무렇게나 뻗어나간

툇마루에 누워

방금 우체부가 가져온 청첩장만 받아놓고

멍석에 널린 고추만

눈시울이 붉어지도록 바라보고 있습니다

- 이창수,​『귓속에서 운다』(실천문학사, 2011)

사루비아 / 정양

너를 안으면 세상이

다 내 것 같았다

거센 물길로 지친 산길로

너를 보내고

물길도 산길도 오만가지로

다 막히고

미친 바람만 그렇게도 불어쌓더니

선사(先史)의 어느 가을 햇살을 훔치어

너는 반짝이며 돌아오느냐

오만가지 그리움으로 눈이 부시어

미치다 만 햇살로 돌아오느냐

잊을 일도 버릴 일도 이제는 없는

햇살만 햇살만 뜰에 남아서

숨 막히어 훔쳐보는 사루비아꽃

새빨간 거짓말처럼

사루비아는 한사코 피어 있다

- 정양,『눈 내리는 마을』(모아드림, 2001)

사루비아 / 이정록

신문 위로 소나기 쏟아진다. 사철 입는 겨울 코트가 묵직해진다. 스무마리 남짓한 비둘기와 맨땅 겸상하는 나발 소주가 물먹은 외투를 가로등에 묶어 비튼다. 남의 집 첫술부터 이놈의 먹물이 문제였지, 질질 끌고 가서 에어컨 실외기에 팔자를 펴 말린다. 그림자도 먹물이네, 덩치 큰 송풍기도 어깨를 들썩이며 구시렁댄다.

신문도 급수가 있어, 욕 많이 얻어먹는 신문일수록 따뜻하지. 면수가 많잖아. 미끈미끈한 광고와 동침하려면 신혼방 꽃무늬 이불처럼 컬러라야 되지 않겠어. 금상첨화 원앙금침이라도 새벽에 술 깨면 추워야. 중앙은 아예 안 써. 갓난이 이불처럼 쪼그마해서 말이여. 안마당에 기차 들어오고 옥상에 백화점 들여놓고 사는 놈 있으면 나와보라니까. 사루비아 꽃술이 그렁그렁 맞장구치려다가, 제 눈물 속 먼 하늘이나 들여다본다.

소나기 쥐어짠 손바닥에 사루비아 피었다.

붓 빤 먹물 양동이 시원하게 엎어버린 서녘 하늘도 오랜만에 손금 환하다.

- 이정록,『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창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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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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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 시 공유 감사해요.

    안경쓴지식인DotDotD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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