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경주 문무대왕릉, 신비로운 수중릉의 이야기
흑치상지
2025-03-14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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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武大王陵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봉길해수욕장 맞은 편 동해 바다에 위치한 작은 바위섬이며, 신라 문무왕의 왕릉으로 유명하다. 사적 제158호로 지정되었으며, 일명 대왕암(大王岩)과 대왕바위라고도 한다.
기록과 대조해 감은사지나 이견대 등의 용도, 구조 및 위치로 보아 대왕암이 바로 승하한 문무왕을 장사지낸 문무왕릉임은 거의 이론의 여지가 없다. 아래에 있는 논란들은 문무왕의 화장한 유골을 뿌린 산골처인가, 아니면 유골함과 부장품이 지금도 안에 들어있는 수중릉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고, 전자라고 해도 이미 신라 당대부터 윤회해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있는 상징적인 장소로 여겨졌기 때문에 사실상 왕릉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해중왕릉(海中王陵)
2.1. 알려진 역사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이룬 뒤 자신의 시신을 불교식으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안장하면 용이 되어 불법을 떠받들고 나라를 지키겠다고 유언하고는 재위 21년(681)에 사망했다. 신문왕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서 장사하였다.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은 동해의 용이 된 부왕을 위해 인근에 왕사(王寺) 감은사를 세우고, 용이 드나들 수 있는 수로까지 파 놓았는데 이 수로가 동해 바다로 이어져 대왕암으로 직결된다. 신문왕이 만든 전망대(이견대) 역시 대왕암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장소에 있다. 이 대왕암은 오랫동안 '댕바우(대왕바위)'라 하여 문무왕의 왕릉으로 알려졌고, 해녀들은 이 근처를 신성시해서 가지 않았다고 한다.
대왕암이 한때 잊혀져 있던 걸 후술할 1967년에 '발견'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사실이 아니며, 바로 이미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 고유섭이 발표한 <경주기행의 일절>에서도 '모름지기 경주에 가거든 동해의 대왕암을 찾아 문무왕의 정신을 기려 보라'고 할 정도로, 이미 대왕암이 문무왕의 유적이란 건 알 만한 사람들한텐 모두 알려져 있었다. 물론 지금처럼 방문객이 꾸준히 있는 그런 관광지는 아니라서 1970년대까지 대왕암 앞은 지금과 달리 인기가 하나도 없고 오가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든 말 그대로의 '동해 바다'였지만, 음력 초하루와 보름날 밤에는 참배객들이 마치 약속된 시간인 것마냥 기도하러 찾아왔다고 한다.
1964년 10월 24일, 한국일보는 문화재청과 함께 신라오악학술조사 사업을 통해 문무왕릉에 대해 조사하다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문무대왕릉이 현재의 대왕암 바위라는 것을 알아내게 된다. 그리고 조사를 하게 되는데 이곳이 문무왕의 장례지라는 것을 파악하고는 조사를 하게 된다. 정영호 교수를 포함한 3명의 학자들은 그 당시 대왕암까지 조각배를 타고 가서 대왕암 내부 웅덩이에 들어가 장대를 쑤셔 그 복판 바윗돌 밑에 구멍이 뚫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런 조사 성과를 토대로 조사단이 그린 대왕암 내부 모식도가 5월 18일자 한국일보 5면에 실렸다. 여기서 조사단이 그린 모식도에는 바위 밑에 유골상자와 부장품을 담은 관 같은 석함이 있다.
당시 조사단 중 한명인 정영호 교수는 이렇게 회고한다.
1967년 5월 15일 오전 10시에…필자는 김원용·김기웅 선생님과 함께 해중 능역(陵域)에 들어가 3t 무게의 복개석(覆蓋石) 밑에 용혈(龍穴)이라 칭할 수 있는 큼직한 암혈(巖穴)이 있음을 확인하여 길이 6m가 넘는 대나무 장대가 다 들어가도 모자람을 알게 되었다. 5월 중순 동해수(東海水)는 역시 냉기로 몸이 떨렸으나, 흥분된 1시간의 작업을 끝내고 나니 오히려 훈기가 들었다.
이 조사 내용대로라면 바위 아래 공간이 발견이 되었기에, 대왕암 내부 복판 바닥에는 관이나 유골상자를 안치할 시설을 안치하기 위한 홈을 파고, 그 위를 복개석이라 칭한 거대한 바위 덩어리를 덮었다고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이 의견만 본다면 대왕암은 물속에 유골을 모신 수중릉의 개념과 일치한다. 당시에는 현재의 최신장비가 없어 주변을 직접 몸으로 부딪혀가며 조사했는데, 그 결과 바위 아래에 어느 정도 틈새나 공간이 있음을 알고는, 바위 아래에 유골과 부장품을 모신 공간이 있다는 학설을 내놓았다.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의 산치대탑이나 익산 미륵사 석탑 하부의 사방에 통로를 마련하듯이 불탑 또는 승탑의 형식을 적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수로의 한가운데 해수면 약간 아래에는 마치 석관 뚜껑이나 고인돌처럼 보이는 커다란 바위인 복개석(뚜껑돌)이 있다.
하지만 대왕암이 문무왕의 화장한 유골을 장사한 안장처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인공적으로 조성된 해중왕릉(수중왕릉)이 맞는가 하고 의문을 품는 의견도 있었다. 황룡사, 감은사 등을 발굴했던 조유전이 쓴 <발굴 이야기>(1996년)에는 감은사를 발굴하는 도중 황룡사의 종이 대종천 근처에 빠졌다는 소문을 듣고 대왕암 근처를 조사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대왕암이 해중왕릉이라는 것은 아직 명확한 사실로 밝혀진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감은사 종을 수색하면서 대왕암의 관 같은 뚜껑 돌을 들어올릴 수도 있었지만, 신비를 보존한다는 차원에서 들어올리지 않고 그대로 남겼다고 적었다.
사실 현재의 대왕암은 온전한 형태는 아니다. 증보문헌비고에 인조 15년(1637) 10월 유전이나 가스전의 징후로 추정되는 땅불로 대왕암이 불타 바위가 일부 부서졌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경주 바로 옆인 울산 앞바다에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가스 자원을 채굴하는 가스전이 있었다.
2.2. 2001년 재조사: 바위 밑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2001년 KBS 역사스페셜이 지리학자들과 함께 최초로 대왕암을 직접 탐사했다. 역사스페셜 팀과 지리학자 조사단은 대왕암 십자수로의 끝을 모래주머니로 막은 후 양수기로 물을 빼내어 대왕암 한가운데에 있는 바윗돌인 복개석을 비파괴검사로 조사했다.
그런데, 조사해보니 복개석은 석관 뚜껑이나 덮개돌이 아니었다. 그냥 약 20톤 정도 되는 거대한 바윗돌이었고, 복개석 아래에는 부장품은커녕 유골상자나 사리함 등을 묻은 공간이나 흔적조차 없었다. 저 바위가 놓인 땅은 부드러운 흙층이나 모래층이 아니라 주변 암초의 일부이자 엄연한 암석층인지라 도저히 파내려야 파낼 수가 없는 구조였던 것. 결론적으로 바위 안이나 바위 밑에 부장품이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1960년대 신라오악조사단은 왜 바위 밑에 유골상자와 부장품을 모신 공간이 있다고 추측했을까? 바위 아래가 절리층인지라 쩍쩍 갈라진 틈새가 많은 암석층이어서였다. 위에서 적었듯 당시에는 비파괴검사 장비 등 최신식 장비들이 전무한 상황이어서 바위 아래를 막대기로 쑤셔가며 조사했는데, 하필이면 막대기에 바닥 틈새 공간들이 잡혔고, 이 당시에는 틈새를 유골상자와 부장품을 모신 공간으로 오인한 것이다.
2.3. 그러면 왜 이곳을 조성했는가?
한편, 2001년 때 조사 당시 지리학자들에 따르면, 현재의 복개석인 그 바윗돌은 대왕암에서 자연적으로 떨어져 틈새에 끼어있었을 텐데, 그 바윗돌을 석공들이 밀어 꺼내어 대왕암 중심에 갖다놓았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2001년 조사 때 대왕암의 십자형 수로와 대왕암 안쪽을 인공적으로 깎아서 다듬은 흔적까지 발견되었다. 바닷물이 동쪽 수로로 들어와 서쪽 수로로 빠져나가는데, 물이 잘 빠져나가도록 서쪽 수로를 깎아서 동쪽 수로보다 더 낮게 만든 흔적이 나왔다. 대왕암의 안쪽도 툭 튀어나온 부위를 정으로 깬 흔적이 있었다.
유골이나 부장품을 안장하지 않았다면 왜 신라 왕실은 석공들을 시켜 대왕암을 다듬고 정리하는 수고를 했는지 의문이 남는데, 문무왕의 유골을 뿌린 산골처인 대왕암을 아예 문무왕을 기리는 정식 성지로 만들고자 바닷물이 잘 드나들고 흉한 부분이 없도록 외양을 다듬었다는 학설이 가장 유력하다. 즉, 문무왕을 제대로 추모할 수 있는 허묘(墟墓)를 해중릉식으로 제작한 셈이다. 대왕암에 문무왕의 유골이 안장되지는 않았더라도, 문무왕이 살아 생전에 관계가 깊은 장소이고신라 왕실에서 대왕암을 추모공간으로 삼고자 작업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학설을 정확히 말하자면 문무왕의 유골을 산골하여 대왕암에서 뿌리긴 하되, 그래도 왕의 장례이다 보니까 아예 일반 사람들이 화장 장례 치르는 것같이 화장한 재를 바다나 강물에 뿌리듯 할 순 없어서 나름의 추모 공간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수로에 바닷물이 조금이라도 더 잘 드나들게 만들고, 암초 사이에 끼어 있던 커다란 바윗돌을 십자수로 아래에 밀어 넣어 현재처럼 수로 가운데에 바윗돌이 놓여진 모습으로 정리한 다음 나머지 부분들을 다듬고, 조성 작업이 완료된 후에 그 위에서 화장한 문무왕의 유골가루를 뿌리는 절차 장례를 엄숙하게 치른 것이다.
결론적으로 대왕암은 문무왕의 유골함이나 부장품은 없지만, 문무왕을 기리는 추모 공간이자 사적으로서 '해중왕릉'의 의미는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무속 관련
예부터 영험한 곳으로 여겼기 때문인지 오늘날에도 이곳에 가면 제를 올리는 무속인들이나 대왕암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을 적잖이 볼 수 있다. 아예 캠핑카처럼 트럭에 가재도구를 싣고 와서 장기간 기도하며 상주하는 무속인도 있다. 문무왕이 동해의 수호신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 말로는 전국에서 소위 '기도빨'이 1위인 곳으로 무속인들 사이에서 여겨진다고 한다.
하지만 몰상식한 관광객이나 치성을 올리고 쓰레기를 무단으로 버리고 가는 무개념 무속인들 때문에 계룡산과 마찬가지로 이들에 대한 비판이 많이 나온다. 계룡산은 그나마 단속을 많이 해서 좀 줄었지만 여기는 지금도 종종 대왕암 맞은편 해변을 찾아보면 크고 작은 기도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런 짓은 무속인들 사이에서도 비판이 많은지라 제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치성을 올리는 게 아니라 간소하게 차리고 경만 읽고 가는 이들도 많지만, 모든 무속인이 다 경 읽는 경사인 것도 아니고, 무속인들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중앙교단도 없는지라 그저 관리 인력만 고생할 뿐이다.
2020년 6월, 경주시가 문무왕릉 주변을 정리한다고 발표를 했다. 경주시는 이 일대가 문화재보호구역인 만큼 문화재위원회 승인을 거쳐 오는 2026년까지 220억원을 들여 사업을 마무리 할 계획이라고. 역사광장, 비석공간, 해양역사문화관을 만들어 문무대왕릉에 대한 이해를 돕고 인근 이견대와 감은사지로 이어지는 보행 탐방로롤 만들며, 위에 적은 무속행위 역시 금지하거나 놔두는 게 아니라 해변 남쪽에 무속인의 공간을 아예 따로 조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출처-절대적이고 상대적인 지식의백과